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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들/재미있는 소설들

화차(火車)

화차는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적인 작품들 중 하나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지옥에서 죄인을 실어 나르는 불타고 있는 수레라고 한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제목이 내용을 잘 표현했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은 사고 부상으로 휴직 중인 형사 혼마 슈스케가 먼 친척뻘 되는 가즈야라는 청년으로부터 약혼녀인 세키네 쇼코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은행에서 근무 중인 그는 거래처 직원인 그녀와의 결혼을 앞두고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다 심사과정에서 그녀가 과거에 개인파산을 신청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묻자 그녀는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더욱 의아했던 것은 가즈야가 보기에 그녀 자신이 과거에 본인의 개인파산을 신청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눈치였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종 사건이라고 여기고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던 혼마는 이 사건을 파고들수록 천애고아라고 알려진 세키네 쇼코 뒤에 또 다른 여자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붙어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소설은 혼마의 조사를 통해서 세키네 쇼코와 또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밝히고 이 둘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찾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카즈야의 약혼녀는 왜 그토록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었는지 파헤치는 내용도 핵심 요소 중의 하나다.

 

책의 본문 중에 이 부분이 책의 흐름의 핵심을 잘 표현한 것 같다.

별안간 이사카가 노래하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화차여....."

"화차?"

 뒤를 돌아보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혼마에게 이사카가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하느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젯밤에 집사람이랑 개인파산 얘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떠올랐어요. 옛날 노래예요. [슈교쿠슈]에 있던가."

돌고도는 불수레. 

그것은 운명의 수레였는지도 모른다. 세키네 쇼코는 거리서 내리려했다. 그리고 한 번은 내렸다. 

그러나 그녀로 변신한 여자가 그것도 모르고 또다시 그 수레를 불러 들였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지? 혼마는 밤의 어둠 저편을 향해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소설은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 초의 일본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 전반적으로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작가는 신용카드와 소비자금융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본에 잠식당한 현대 소비사회 속에서 예상치 못한 경제적 파산을 겪으면서 낙오되어 버린 사람들의 현실을 비교적 냉소적이고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한 개인이 이런 비극에 쳐하게 되는 이유는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적 구조에 인한 부작용이라는 작가의 사회문제의식이 이 소설의 전반에 짙게 깔려있다. 특히 혼마가 조사 중에 미조구치라는 변호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 둘의 대화에서 작가의 이런 생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무분별하고 쉽게 발급되는 신용카드로 인해 신용대출이나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등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빠르게 개인파산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하기보다는 사회소설(social novel)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책의 두께감이 조금 있긴 하지만 속도감 있는 전개로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1992년에 출판된 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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